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다

고통과 죽음의 현실 🔗

죽음이나 그에 버금가는 고통은 삶을 위태롭게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앞에서 사람은 갈대처럼 흔들리기 마련이다.
인생에 늘 기쁜일만 있으면 좋겠으나 누구나 결국은 죽음을 마주한다.
지인의 죽음이든, 가족의 죽음이든, 본인의 죽음이든,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고통 속에서 느끼는 예수님의 부재 🔗

반면 예수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헌금도 내고 봉사도 하고 믿음을 갖고 있는 우리가 고통 받지 않도록 어떤 기적이라도 일으키셔야 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해주셨냐며 고통 앞에서 예수님을 탓하기도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 🔗

그러나 인생은 원래 그랬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고통과 죽음은 늘 있었다.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거다.
참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분처럼 부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5,25-26)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

혹시 죄 많은 나는 구원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하며 하느님과 가까이하고 성경과 교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하느님이 사랑 가득하신 분이라는 걸 안다.


"주님, 당신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느님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와 진실은 넘치시나이다." (시편 86,15)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7-39)


이렇듯 성서 도처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희망이 있다.
죽더라도 자애로운 아버지께서 구원해주시리라는 희망이 있다.

종말론적 선취의 의미 🔗

이런 하느님께 언제나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희망을 갖게 해준다.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며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품는 사람은 종말론적 선취를 이룬것이라 교회는 설명한다.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머무르는 삶 🔗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 머무르자.